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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원점.(2)번뇌는 버려야 한다.2-2

내리석잔 2007. 1. 20. 07:08

그러나 주어진 것이라고 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육체주를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건강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부모를 위시하여 육체조상에 대한 가장 큰 효양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공양도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육체는 이처럼 언제나 불이일체인 것이다.

육체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에 연결되고 마음의 번뇌는 또한 육체 세포의 활동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자칫 무리한 일을 하는수가 있다. 기일내에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에 쫓겨 육체를 혹사한다. 밤 2시 3시 까지 일을 하더라도 정신이 긴장하고 있으므로 피로는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육체는 육체의 한계가 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면 일의 목적 대신에 병을 얻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육체는 적당한 운동과 휴식을 필요로 하고 있다. 정신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운동과 휴식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유지된다. 낮에는 육체를 움직이고 밤에는 휴식을 취한다. 이러한 원리원칙을 무시하고 마음만 앞서 육체의 휴식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육체는 당연히 신진대사가 약화되어 결국 병에 걸리게 된다.

적당한 운동을 하지 않고 난의, 포식 을 일삼고 있으면 육체는 저항력을 잃고 대수롭지 않은 감기라도 큰 병을 유발하게 된다.

오랜 직장의 긴장에서 풀려나 남은 여생을 은급으로서 지내려고 하는 정년 퇴직자가 긴장을 풀고 1.2년 살다가 죽는 예가 매우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정신 활동과 육체활동의 상관성,원리를 잊어서는 안된다.

이 원리는 생활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경제적으로 어렵다. 혹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하는 환경속에서 인간은 아무래도 자기를 발견하기가 어려운 듯하다,

돈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기 마련이고 가난하여 내일의 끼니가 여의치 않는 상태이면 마음까지도 가난하게 되어 남의 일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어진다.

옛부터 가문보다는 성장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환경에 의해서 인격의 형성이 크게 달라진다

나의 지도령 원투스리는 과거세의 모세라는 사람의 일생을 다음과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는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왕궁에서 거두어져 자라는 바람에 거기서 지와 인과 용을 배웠고, 성장함에 따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모순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성의 안팎을 막론하고 노예의 괴로움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노예해방을 위하여 결연히 일어섰던 것이다.

만약 모세가 왕궁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노예의 자식으로서 성장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떠한 운명의 길을 걸었을 것인다.

운명의 아들 , 모세의 생애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며 그 화려했던 후반생도 아마 매우 다른것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왕궁에서 거두어졌기 때문에 노예로서는 배울 수 없었던 문자를 배웠고 품성을 도야했으며 왕궁의 체제의 뒷면을 알고 사회 전반을 두루 볼 수 있는 소양을 몸에 익힐 수 있었던것이다.

용자 모세는마침내 자기가 노예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모순에 눈뜨게 된다.

그래서 육십 몇 만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안주할 땅을 찾아 사십 몇 년에 걸친 긴 여행길에 올랐던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은 환경에 따라 사물을 보는 시각, 성격,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이다.

정도를 성취하는 길은 고락의 양극단에는 없고, 중도에 있다. 중도의 마음은 찾으면 찾을수록 심오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중도의 마음을 일상 생활의 기본으로 삼고 실천하ㅡㄴ 길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반드시 자아가 튀어 나온다. 이기적인 자기보존의 싹이 트게 마련이다.

우리는 고락 속에 있더라도 이를 극복해야 하며 자기의 결점을 바르게 고치지 않는 한 깨달음의 경지에는 숫제 근접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일상 생활 속에서 항상 반성이라는 행위를 잊지 않고 정신과 육체의 조화, 환경의 조화를 이루도록 힘써야 한다.

중도란 글자 그대로 한가운데의 길이다. 한가운데란 원으로 말하면 원의 중심,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 세상은 남녀, 선악, 미추와 같이 상대적으로 되어 있으며 인간은 그 상대 속에서 영혼을 닦아나가는 것이다.  만일 선인뿐이고 괴로움이 없는 세계라면 수행은 되니 않는다.

인간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인생을 통하여 비로소 빛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광명의 세계를 찾았을때의 그 기쁨은 비할 데 없이 큰 것이다.

그것은 전생윤회의 비밀을 알고 이 현상계에 육체를 지니고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위대한 의미를 깨닫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깨닫는 것 없이 고뇌로부터 벗어나지도 못하고 번뇌 속에서 일생을 보내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태어나기 전의 둥근  마음을 왜곡된 상처 투성이로 만들어 저 세상으로 되돌아간들 그것 역시 자업자득일 뿐이다.

저지른 스스로의 죄는 엄한 지옥계에서 그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떠한 괴로움도 견디고 위대한 인생의 가치를 깨달아야 하며 또한 욕망의 바디에서 방황하고 있는 길 잃은 중생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 구해 주어야 한다.

그 실천 행동이야말로 신의 자식으로서의 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어떤 자는 국가를 위하고 민족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사상에 취하여 중도의 길을 그르치고도 그것을 대의로 착각하고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시 한번 대의와 명분이란 것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류는 본디 모두가 다 형제이다 지구는 하나이고 거기에는애당초 국경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 인류생존의 긴 역사에 의해서 저마다의 자기보존, 자아아욕에 따른 생각으로 말미암아 권력이 생기고 지배가 생겨, 경계가 대중의 희생위에 만들어져 갔던 것이다.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나라와 나라의 경계는 기정 사실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가 인류의 이상으로부터 벗어나 각 나라의 민족 에고이즘이 되어 그것이 인류의 한 척도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인류의 큰 잘못이다.

그리고 개인의 마음까지 일상 생활 속에서 선악의 감정에 지배되어 이념보다도 자기의 이익, 가족의 행복이 선행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일까

이유야 어떻든 간에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은 선인이고 자기를 매도하는사람은 악인으로 몰아부친다.

이와 같이 우리의 개인생활이건 나라와 나라의 관계이건 모두가 자기의 편리, 자기 나라의 편리, 자기 민족의 편리라고 하는 자기보존의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선, 악, 정 .부정 의 기준은 지금 엉망이다.

설사 법률이 있다고 해도 법률이전의 개개의 자기보존의 감정이 선,악, 정 ,부정을 결정짓고 있다.

이래서는 중도의 마음을 알 길이 없다. 중도의 마음은 자아를 떠난 객관적인 입장에 서지 않으면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 자신을 백지의 상태에 놓아야 한다.

지식이나 경험에 의해서 머리 속에 채워져 있는 기성관념들을일단 옆으로 밀어내 놓고 자기의 모습을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여러가지 지식이나 경험 따위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한 얄팍한 척도로서 사물을 보면 자기의 척도 이외의 넓이는 알지 못한다. 상황의 판단도 흐려지고 만다.

중도의 마음은 사심이 없는 마음이다. 그것은 곧 신의 마음이요, 신의 척도인 것이다. 이 신의  척도에 섰을 때 비로소 바른 판단이 서고 정신과 육체, 환경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생활을 할 때, 우리는 자기를 알게 되고 가정과 나라의 평화며, 이웃나라와의 조화도 유지될 수 있으며 불국토 유토피아의 완성에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상실한 사상으로서는 인간의 대조화를 이룰 수 없으며, 투쟁과 파괴의 아수라계를 만들어 낼 뿐이다

중도의 마음을 일상생활의 지표로 삼고 끊임없는 반성과 보은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만이 우리가 정도를 성취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