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사공으로 감정적으로 노를 저으면 배가 어떻게 되겠는가. 진행방향을 잘못 잡는 일도 있게 될것이다.감정의 부조화는 그대로 육체적 부조화를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올바른 판단도 불가능해진다.
감정이 가랑ㄵ지 않는한 바르게 말하는것 .듣는것, 보는것. 생각하는 것이 다 어렵게 된다.
자기에게 이롭지 못한 말을 듣거나 보거나 했을 경우에 우리는 곧잘 감정적이 된다. 이것은 중도가 아니다. 자기 보존의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제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듣거나 보거나 한다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될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오해 때문에 생긴 감정의 갈등인 경우에는 그 오해를 풀어주어야 한다. 상대방이 감정적으로 다가오더라도 냉정한 이성의 힘으로 바르게 새겨듣고 바르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상대방의 감정적 언동에 휘말려 자기 자신도 이성을 잃는다면 상대방의 독을 그대로 먹게 된다. 자신의 마음을 어두운 구름으로 가릴 뿐만 아니라 둘레의 영위기마저 부조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독은 체내에 남아 흘러다니게 된다. 그래서 심신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우리 그룹의 사람가운데에는 과거세에서 동기생이었다는 사실을 비록 몇 천 년이 지난 오늘이라 하더라도, 당시의 언어로써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감격에 겨운 눈물의 해후를 체험하게 된다.
어느 강연회장에서 의 일이었다. 와이에스(33세)가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와세다 대학의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한 사람인데 인생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그의 백모 미세스 브라운의 안내로 나에게 온 사람이었다.
와이에스ㅡ는 신이레 대한 나의 강연을 몇차례 듣더니 생활이 변 했고, 마음이 조화됨에 따라 지금부터 2500년 전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포코라 파라 가리 파라세세 파라파라....."
라고 자기가 고타마 붓다의 제자였던 바라나시의 야사 라는 사실을 밝혔던 것이다.
나도 인도시절에는 같은 사로몬으로서 야사와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강연회에 참석한 많은 천중앞에서 서로 손을 잡고 감격적인 추억담을 나누었다.
이와같은 일은 우리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마하반야바라밀다",즉 위대한 지혜가 솟아나오기 때문이다.
마하반야바라밀다는 " 내재하는 위대한 지혜에 도달한다."라는 뜻이다
여러사람앞에서 부끄러운 생각없이 눈물 흘리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부끄럽다는 감정도 자기보존이다. 사람들 앞에서도 마음에 거짓이 없으면 부끄럽다고 하는 심적 작용은 일어나지 않는 다. 자기를 꾸미려고 하는 위아(僞我)가 부끄럽다고 하는 괴오움을 만들어 낸다. 자기보존인 것이다. 그리고 식욕과 정욕은 본능과 감정의 영역에 속하는 작용이다.
비록 짝사랑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본능과 감정이 불타고 있으므로 마음속에 사랑의 동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육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마음은 불타며 곧 그 모습은 육체에도 나타난다.
사춘기의 신체는 핑크색의 빛에 쌓인다. 후광의 빛이 변화하는 것이다. 성이 났을 때에는 불꽃같은 핏빛의 후광이 나타난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우리의 의식속에 낱낱이 기록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만족할 줄 알고 , 본능과 감정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안된다. 이 브레이크가 마음의 이성의 작용이다.
음식물은 약간 모자랄 정도로 먹는 것이 좋은 줄 알면서도 맛있는 것을 대하면 본능적으로 과식하게 된다.
그러나 술이든 담배든 끊으려고 작심만 하면 끊을 수 있다.
이성을 확고하게 가지고 강한 의지력을 발휘하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자신에게는 무르고 관대하기 때문에 자칫 본능이나 욕망의 주문대로 살고 싶어한다.
어린다이들에게 이성과 의지의 힘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들 마음속에 각 기능은 성장함에 따라 지성의 힘으로 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갓 태어난 젖먹이는 모유나 밀크를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데, 빨 줄 안다. 이것도 식생활을 했던 과거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본능적 능력이다.
그리고 성장과 동시에 오관의 작용이 활발해져서 욕망의 싹이 자란다. 자아의 싹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본능과 감정의 영역이 먼저 부풀어 난다. 그러나 아직 지성, 이성 의 작용이 결핍되므로 무작정 자아를 관철시키려는 응석을 부리게 된다. 이 시기로부터 좋은 환경과 부모밑에서 훌륭한 중도의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게 된다. 아직 인생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지성은 오관에 의해서 수용되는 것과 교육으로 배운 것에 의해서 길러져 간다.
유치원에 갈 무렵에는 선악의 판단이 조금은 가능해진다. 그래서 친구나 이웃 가정의 생활을 통해서 스스로의 지성을 키워나간다.
어버이로서 자식의 예의범절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 걸친 교육에 주력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자식을 편애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지나치게 엄격한 것도 자식의 마음을 좁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와같이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서 마침내 이성의 영역마저 우리의 10% 정도밖에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물에 잠긴 빙산에 비유할 수 있다. 빙산의 90%가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의식의 90%는 잠재의식층에 내재해 있게 된다.
10%의 표면의식은 주로 자아가 표면으로 드러나서 자기본위의 어두운 상념을 만들어 내기 일쑤이다. 올바른 중도의 길은 이 10%의 표면의식의 길잡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도의 길을 지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자신의 결점을 수정하는 데에는 비상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결점을 바로잡아 둥글고 넉넉한 마음을 키워나가면 항상 원만하고 기쁨에 넘치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식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면 자존심이라고 하는 괴물에 홀려 도리어 마음이 비뚤어지기 쉽게 된다. 타인에게 자아를 강요하여 욕설을 늘어놓거나 속이기도 하며 이런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고 철딱서니 없는 자들이다.
지나 의만을 좇아 신의 자식인 자기의 본성을 망각해버린 것이다. 지성이 아무리 풍부해도 마음의 조화를 잃은 사람들은 인격자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들은 원만하지 못한 편협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서를 잃고 메마른 인생을 보내도 한 세상이요, 욕망대로 짐승처럼 살아도 한 세상이면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팔정도의 인생을 걸어도 역시 한 세상이다.
그러나 같은 한 세상이라도 그 내용과 크기에 있어서는 대우주와 겨자씨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알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결과는 스스로 마음에 품은 상념의 씨앗들이 결정짓는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일생동안의 자신의 행위와 상념은 자기자신이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되는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심안으로 사람들의 마음의 움직임을 보면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일념삼천이란 표현과 같이 그 형태는 참으로 천태만상이다. 얼굴과 체격이 다른 것처럼 그 마음의 모양도 십인십색이라는 말이다.